발자취 | 건강 에세이
《다식 다음, 다뇨》 Ep.16
당뇨 약을 줄였다. 하루 두 알에서 한 알로. 의사는 “이제 혈당 조절이 꽤 잘 되고 있어요. 스스로 몸이 좋아지고 있다는 증거죠.”라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솔직히 꽤 큰 기대를 했다. ‘이제 덜 피곤하겠지. 몸이 한결 가벼워지겠지. 다른 사람처럼 활기찬 저녁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회사에서는 어떻게든 버티는데, 집에만 오면 마치 전기 코드가 뽑힌 것처럼 눈꺼풀이 금방 내려앉았다. 기대를 배신한 현실 앞에서 나도 모르게 외쳤다. “이게 나만 그런 건가?”
나는 스스로에게 실망했다. 약까지 줄일 만큼 몸이 좋아졌다면, 피로도 함께 줄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하지만 쏟아지는 피로 앞에서는 '좋아졌다'는 의사의 말도, 줄어든 약의 개수도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피로가 '내 의지의 문제'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좋아지고 있는데도 쏟아지는 피로, 그 정체
나는 생산직 알바를 하고 있다. 몸을 쓰는 일의 특성상, 손이 잠시라도 멈추면 라인이 흔들린다. 특히 야간 근무가 이어질 때면,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해야 한다. 정해진 동작을 수천 번 반복하는 동안, 어깨와 손목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피로가 켜켜이 쌓인다. 이 물리적인 피로는 하루를 지배하는 절대적인 기준이다.
✔️ 피로의 변종, '개운하지 않은 잠'
문제는 피로의 종류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예전의 피로는 '힘들다'는 감각이 명확했다. 퇴근 후 쓰러져 잠 몇 시간 자면 '아, 좀 괜찮아졌다' 하고 몸이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지금의 피로는 달랐다. 분명히 몸은 고되지만, 잠을 잔다고 해결되지 않았다. 10시간을 넘게 자도 아침에 눈을 뜨면 머리맡에 누군가 돌덩이를 두고 간 것처럼 개운하지 않았다. 그 피로는 근육이 아니라, 안쪽의 깊은 장기 어딘가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듯했다.
나는 이런 상태를 두고 스스로를 '게으르다'고 몰아세웠다. '다른 사람들은 밤새 일하고도 운동하고 취미 생활도 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무기력할까?' 하지만 이건 단순한 나태가 아니라, 몸의 근본적인 리듬이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게 '혈당의 리듬'이라는 걸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 의학적 관찰: 왜 혈당이 좋아져도 피곤한가?
나는 인터넷을 뒤져 내가 겪는 이상한 피로의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뇨 관련 정보를 찾아보다가 이런 문장을 발견했다.
“혈당 수치가 정상화돼도 세포 내 에너지 대사가 회복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혈당이 급격히 낮아지는 과정에서도 피로감이 유발될 수 있으며, 피로감이 남는 건 몸이 새 리듬에 적응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 서울아산병원 건강정보센터, 당뇨병 피로 증상 설명 중
이 문장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조금 풀렸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었구나.’ 그동안 나는 혈당 수치라는 '숫자의 절댓값'만 보고 왜 피곤한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몸은 숫자가 아니라 '리듬'으로 움직였다. 약을 줄였든, 혈당이 좋아졌든, 세포 내 에너지 공장이 정상화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좋아지고 있는 중이니까, 느리게 가거나 혹은 일시적으로 더 힘들다고 느끼는 것이 당연했다.
회사에서 멀쩡하고 집에 오면 무너지는 '긴장의 끈'
이 피로의 또 다른 미스터리는 바로 '장소 차이'였다.
회사에서는 이상하리만큼 멀쩡했다. 8시간 동안 쉬지 않고 라인 옆에서 움직이는 건 고되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오히려 일이 많을수록, 라인이 꼬여서 긴장해야 할수록 졸음이 달아났다. ‘아, 그래도 나는 일할 땐 쓸모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집에 와서 문을 닫고 소파에 앉는 순간, 혹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는 순간, 마치 누군가 스위치를 끈 것처럼 눈이 감겼다. 이 급격한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또다시 나를 책망했다. '회사는 돈을 버는 곳이니까 억지로라도 버티는 건가? 역시 나는 의지가 약하군.'
💊 약이 아닌 '긴장'이 나를 지탱했던 이유
이 패턴에 대한 답 역시 의학 정보에서 찾았다.
“스트레스 상황에서는 코르티솔(Cortisol)이 분비되어 혈당을 높이고 각성 상태를 유지한다. 하지만 긴장이 풀리고 이 코르티솔 수치가 떨어지면 혈당이 급격히 떨어지며 피로와 졸음이 밀려올 수 있다.”
— 대한당뇨병학회, 스트레스와 혈당 관리 가이드라인 (강조 처리)
결국, 회사에서는 '긴장'이라는 호르몬이 일종의 각성제 역할을 했던 셈이다. 생산직 알바의 고된 환경 자체가 나를 계속 긴장 상태로 몰아넣었고, 그 상태가 혈당을 인위적으로 높여 일시적으로 에너지를 쥐어짜 쓰고 있었다.
그 긴장이 풀리고 집이라는 안전한 공간에 도착하면, 에너지를 억지로 잡고 있던 끈이 '탁' 하고 끊겼다. 나는 그걸 단순한 '게으름'으로 오해하고,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하지만 이젠 안다. 그건 나태가 아니라, 과도하게 사용된 몸이 마침내 신호를 보내는 순간이었고, 약을 줄인 뒤 혈당 변동폭이 커지면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숫자가 아닌 리듬의 싸움, 내가 찾은 회복의 기록
나는 이 싸움이 숫자의 싸움이 아니라, 내 몸의 리듬을 되찾는 싸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기록'이었다.
✔️ 피로를 기록하면서 찾은 작은 리듬

요즘 나는 일기를 쓴다. '식사 시간', '약 먹은 시간', '졸음이 오는 시간', 그리고 그때의 '피로 감각'을 적는다. 처음에는 막막했지만, 일주일 정도 기록하자 신기하게도 패턴이 보였다.
* 아침 약을 먹은 후 4시간 동안은 비교적 괜찮다.
* 오후 근무 시작 전후엔 급격히 졸음이 심해지며 당이 떨어진 듯한 느낌이 든다.
* 야간 근무 다음날 오전에는 무기력함이 오후까지 오래 간다.
이걸 보며 알았다. 내 피로는 하루하루 달라지지만, 분명한 ‘리듬’을 가지고 있었다. 이 리듬을 존중하는 것이 나를 회복시키는 첫걸음이었다.
내가 스스로 해보는 네 가지 회복 실험 (상세 후기):
이건 거창한 건강 관리가 아니다. 의사의 처방도 아니다. 그냥 내가 나를 관찰하고, 그 리듬에 맞춰 스스로 해보는 작은 실험들이다.
* 시간표 작성: 식사·약·졸림 시간 기록하기
* 시행 전: 대충 식사하고 약 먹고, 졸리면 잤다.
* 시행 후 (느낀 점): 3일만 해도 내 몸의 주기가 보인다. 특히 식사 후 2시간 시점에 졸음이 오는 날이 많다는 것을 확인하고, 이때 간식을 먹는 대신 물 한 컵을 마시거나 스트레칭을 해주는 것으로 리듬을 깨지 않으려 노력했다.
* 활성 휴식: 식사 후 10분 산책하기
* 시행 전: '피곤한데 무슨 산책이야' 하며 소파에 눕거나 그대로 잠들었다.
* 시행 후 (변화): 피로할수록 억지로라도 밖으로 나가면, 급격하게 오르내리던 혈당 리듬이 완화되는 것을 느꼈다. 특히 야간 근무 다음날 무기력함이 길었는데, 아침 식사 후 10분만 햇볕을 쐬고 오면 그날의 무기력함이 오후까지 이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 긴장 이완: 자기 전 깊은 호흡 3분
* 시행 전: 머릿속으로는 내일 라인 작업 생각, 혈당 걱정 등 긴장한 채 잠들었다.
* 시행 후 (수면 질 개선): 하루 종일 쌓인 긴장을 내려놓는 시간. 거창한 명상 없이도,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는 것만으로도 수면의 질이 확실히 달랐다. 새벽 3시에 눈이 번쩍 떠지는 횟수가 줄었다.
* 긍정 기록: ‘오늘 괜찮았던 한 가지’ 적기
* 시행 전: 하루의 끝은 항상 '피곤함'과 '자기 책망'으로 끝났다.
* 시행 후 (정서적 안정): 피곤한 하루 속에서도 '라인에서 꼬인 작업이 잘 풀렸다', '점심에 밥을 천천히 먹었다' 등 작게나마 괜찮은 순간을 기억한다. 이것이 '게으름'이 아니라는 증거를 스스로에게 제시하며, 죄책감 대신 격려를 건넬 수 있게 되었다.
결국, 당뇨는 숫자의 싸움이 아니라 리듬의 싸움이다.

혈당 수치가 좋아졌다는 건 숫자의 이야기다. 하지만 몸은 그 숫자보다 훨씬 느리게 변한다. 약의 개수가 줄었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몸은 여전히 적응 중이고, 그 과정에서 오는 피로는 회복의 일부다.
이제는 누워 있는 시간을 죄책감으로 보지 않는다. 피로는 내가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생산직 일을 하면서 몸이 내 말을 안 듣는 날도 많지만, 이젠 몸이 보내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 "게으름"이 아니라 "회복 중"이라는 이 말에 귀를 기울이며, 오늘도 조금씩 내 몸의 리듬을 다시 맞춰가는 중이다. 그게 나의 회복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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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한마디
피곤하다는 것은 몸이 멈춘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새로운 리듬을 만드는 중이라는 가장 진솔한 신호일지도 모릅니다. 죄책감 대신 응원을 건네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면책 고지
본 글은 의료 전문가의 진단이나 처방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모든 내용은 개인의 경험과 일반적인 건강 정보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질병의 진단이나 치료가 필요할 경우 반드시 전문의와 상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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